신 국제질서와 한일 관계緖論오늘 날 한국이 처한 현실과 주변을 둘러 싼 열강 3국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조명하고 신 국제 질서를 이해하며 우리가 나아갈 길을 규명하고 이를 교정하고 어려움이 무엇인가를 가려내는 데 문제의식을 둔다.本論1.신 국제질서신 국제질서는 그때 그때의 상황에서 정립된 법질서 속에서의 "정의"의 구현을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다. 즉 모두가 기존 국제질서에 타당성을 두고 나온 말들이었다. 걸프전 이후의 신국제질서란 용어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었고, 역사적인 맥락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이르기까지는 크게 세개의 변화요인으로 정의되어 질 수 있다.걸프전쟁 이후의 신 국제질서에 대해서도 크게 두개의 시각으로 정의되어 질 수 있다. 이상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UN중심의 세계공동체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에 비해서 현실주의자들은 어디까지나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만 전후 국제질서를 극적으로 변화시킨 구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는 가상적을 잃은 봉쇄전략을 대치하는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군사동맹체제 보다는 이상적인 집단안보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첫번째 특징을 지닌다.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는 우선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청산과정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는 얄타체제이래 팽배해온 세력정치에 남북관계라는 압력정치의 차원을 추가시킨 것이다. 그와 더불어 기술의 발달 특히 핵무기의 등장은 국제 정치질서의 발달을 근본적으로 위축시킨 이유를 구성했다. 즉 혁명적인 기술의 발달은 남북간의 종속의 문제를 심화시켰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것은 핵무기의 발달이 전후 질서의 이상형인 집단안전 보장 제도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미.소 양진영의 무력대치 속에서 봉쇄전략의 타당성을 낳았고 모두가 거미줄 같은 군사 동맹체제로서 유지되었다.이러한 대치상태를 해소시킨 것이 바로 구소련의 고르바초프에 의한 신사고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의 출현이었고 이는 탈냉전, 탈이념 그리고 경쟁적인 평화공존이 그 상황에서 걸프전쟁은 발발하였다.두번째로는 핵무기의 발달이 비록 집단안보를 무기력하게 했을망정 이는 오히려 핵전불가라는 상황속에서 국제사회에서 높은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상주의자들은 차별적 남.북관계를 전제했으나 현실주의자들은 무차별적 남.북관계를 역설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기존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했던 긴장관계가 경제위주의 긴장관계로 전이했음을 의미하며 이는 경제를 중심으로한 하위정치가 군사, 정치적인 상위정치보다 우위에 서게 된것을 의미한다. 이 상황에서 핵무기의 확산금지 제도는 더욱 그 규제의 정당성과 그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이라크나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고자 하는 국제적인 노력은 바로 신 국제질서가 추구하는 새로운 규범이 되었다.세째로는 걸프전쟁이 지닌 특징으로서 UN의 역할이 중요시 되었다는 점이다. 걸프지역에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분명 현상 국제질서 속에서는 침력을 구성하며 국제정의는 논외로 치더라도 침력의 도미노 현상은 억지 되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UN안전보장 이사회는 12개의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다국적군의 무력사용을 정당화 시켰으며 국제적 공권력을 발동시켰다. 이는 UN헌장속에서 규정하고 있는 집단안전보장에 가장 가까운 형태이었다. 이들 모두가 양극구조가 붕괴되고 다분히 미국중심의 다극구조 속에서 UN은 침략을 응징한다는 명목을 지닌 집단안보의 형태를 창출한 것이다. 이에 UN의 위상은 높여졌고 세계공동체 형성의 마지막 단계인 집단안보를 가시화시킨 것으로서 UN의 역할에 기대를 높였다.끝으로 신국제질서는 질서유지의 주역으로서 미국의 지도력을 부각시킨 것이다. 세계 최강국으로서 미국의 힘이 기존의 군사력뿐만이 아니고 Joseph Nye가 얘기한 바 Soft Power의 행사를 통한 영향력의 행사에 있어서도 미국을 빼고는 어렵게 만들었다. 비록 다원적인 상호의존성 속에서의 단극구조일망정 미국의 지도력은 신 국제질서의 핵심을 이루었다.하고 있다는 점(기술의 발달 특히 핵무기의 등장과 구소련의 붕괴의 영향)■국제사회에서 높은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중요성을 부각■높아진 UN의 위상 세계공동체 형성의 마지막 단계인 집단안보를 가시화하며 동시에 지역 블록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질서유지의 주역으로서 미국의 지도력을 부각 신국제질서의 핵심을 이룸2. 일본의 동북아 및 한반도정책(1) 동북아정책동북아지역에서 일본은 미 일 동맹체제하에서 안보 강화, 자원 및 시장의 안정적 확보를 국가이익으로 하여 ① 안보역할 증대, ② 잠재적 위협에 대한 방어 및 견제, ③ 경제 주도 등과 같은 정책목표를 추구하고 있다.우선 안보적 측면에서 일본은 미 일 동맹체제 하에서 안전보장을 모색하면서도 경제력을 바탕으로 안보역할을 증대함으로써 정치 군사대국의 지위 확보를 도모하고 있으며6), 이를 통해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는 입장을 취한다. 특히 이와 관련, 1994년 9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외상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하여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명하였으며, 일본은 거부권 있는 상임이사국 지위 확보를 위하여 유엔 회원국에 대한 외교활동을 더욱 적극화하고 있다.7)일본은 구소련 붕괴 이후에도 러시아의 극동군사력을 여전히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왔다. 그러나 1997년 11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일본총리의 방러, 1998년 4월 옐친의 방일에 이어 동년 11월 오부치 게이조 일본총리의 러시아 방문으로 이루어진 정상회담에서 북방 4개섬(쿠릴열도 남단 4개섬) 문제와 관련, 양국이 국경선 확정을 목표로 협의해 나가며 이를 위한 소위원회를 설치한다는데 합의했다. 러 일 양국 정상은 회담후 모스크바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양국의 협력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 올린 것으로 평가된다.한편 일본은 중국과 국교수립 25주년을 맞아 중국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장쩌민(江澤民)주석의 방일로 이루어진 정상회담(1998. 11)에서 「평화와 발전을 위한 우호협력 파트너쉽 구축」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발라는 종래의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을 비롯해, 아시아 금융위기 극복방안, 양국간 경제협력, 그리고 북한관련 동북아 안보문제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상호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그러나 일본은 지역강국으로서 중국과 경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특히 동 남지나해에서 중국의 군사력 증강을 우려하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미 일동맹체제 유지, 방위력 증강 및 군사력 현대화, 군사적 역할의 광역화 등의 정책을 추진8) 하고 있다. 1998년 8월말 북한의 미사일 발사후 개최된 미 일 정상회담(1998. 9. 23)에서 미 일 공동으로 전역(戰域) 미사일방위(TMD)체제를 구축하기로 합의한 후 일본정부는 정찰위성 도입을 발표했다. 이러한 일본의 동북아 정책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일본은 동북아지역에서 다원화 현상에 따른 갈등 및 위협 가능성 억지, 일본의 군비증강에 대한 역내 국가들의 우려 불식 등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미 일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냉전체제 붕괴 이후 미 일 동맹관계는 미국 군사비의 포괄적 삭감, 방위분담 확대에 따라 일본이 동북아 역내안보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는 쌍무적 관계로 전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둘째, 일본은 방위력 증강 및 군사력 현대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전후 4차례에 걸친 방위계획을 추진하였으며, 1987년 나카소네(中曾根) 내각은 GNP의 1% 이내라는 방위비 상한선을 철폐하였다.9)셋째, 일본은 동북아지역에서 경제력에 상응하는 영향력 확보를 위해 유엔 평화유지군 역할의 광역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정책은 지역방위전략과 해상안보정책 등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일본은 기존의 경제적 우위를 유지하고, 세계경제의 블록화 추세에 대비하면서 자원과 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전방위(全方位) 경제외교, 미 일 무역마찰 해소, 수출 및 첨단산업 주도의 비교우위 확대, 경제협력의 전략적 이용, 일본 주도의 지역경제권 구축 등 포괄적인 대외경제정책을 동맹체제를 유지해 나가면서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 군사적 역할증대를 모색하는 한편 군사력 증강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2) 한반도정책일본은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 군사적 역할 증대를 통하여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목표는 한반도의 위기상황 발생을 방지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10) 이러한 목표에 따라 일본은 한반도에서 두 개의 한국 정책을 견지해 왔고, 한반도의 긴장완화 및 평화유지를 강조하고 있다.일본은 안보차원에서 한반도의 평화 안정이 동북아의 안정에 중요하며, 북한이 남한에 대해 위협요인으로 존재하는 한 일본에 대해서도 잠재적인 위협요인이 된다고 인식하여 한 일 우호협력관계를 한반도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일본은 한 일간 무역불균형 및 첨단기술 이전과 관련된 양국간의 갈등요인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긴밀한 경제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1990년대에 이르러 일본은 냉전구조의 와해와 한 소 수교, 남북대화 진전 등에 따라 북한과 수교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1999년 12월 1일 무라야마 도이치(邨山富市) 전총리 등 일본의 초당파 의원 방북단과 북한 노동당간에 열린회담에서 양국정부에 국교정상화 교섭의 조속한 재개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정부간 회담의 전단계로 이루어진 정당간 접촉의 형식이긴 하지만 양국간의 관계 개선을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그간 일본인 납치사건 조사, 마약 위조달러 등 제조 수출금지, 이은혜사건, 북송 일본인처 귀향, 핵 미사일개발 문제해결 등을 교섭재개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었다. 그러나 공동성명에서 일본인 납치, 일본인처 고향방문 등과 같은 인도적 문제는 양측 정부가 아닌 적십자사를 통해 해결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북한으로선 조사 주체를 적십자사란 민간조직으로 격하시켜 부담을 크게 줄였으며, 또한 북한과의 수교가 현안 중 하나인 일본정부도 대국민 설득이 용이해진 셈이다. 이에 따라 2000년 세차례에 .
서편제(1994)1. 줄거리동호(김규철 분)는 소릿재 주막 주인의 판소리 한 대목을 들으며 회상에 잠긴다. 소리꾼 유봉(김명곤 분)은 금산댁(신새길 분)을 만나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양딸 송화(오정혜 분) 동호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동호와 송화는 오누이처럼 친해지지만 아기를 낳던 금산댁은 아기와 함께 죽고 만다. 유봉은 송화에게는 소리를, 동호에게는 북을 가르쳐 둘은 소리꾼과 고수로 한 쌍을 이루며 자란다. 그러나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줄고 냉대와 멸시 속에서 살아가던 중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하고 동호는 집을 뛰쳐나간다. 유봉은 송화가 그 뒤를 따라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소리의 완성에 집착해 약을 먹여 송화의 눈을 멀게 한다.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일을 사죄하고 숨을 거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송화와 유봉을 찾아 나선 동호는 어느 이름 없는 주막에서 송화와 만난다. 북채를 잡는 동호는 송화에게 소리를 청하고, 송화는 북장단 솜씨로 그가 동호임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헤어짐의 길을 떠난다.2. 작품 내 배경1930년대 말엽부터 광복 후 1960년대 초엽까지 주인공 송화(오정해)의 삶을 따라가고 있다. 무대는 전라남도 그녀의 행적을 따라 내려가며 전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한다.1) 청산도:전남 완도군 청산면 소재. 백사장보다는 보족산, 대봉산 등 높이 300m 내외의 산들이 섬을 채워서 청산도라 불리운다. 낭만적인 정경으로 조선시대에는 선산도라 불리웠으나 고려와 조선 때 왜구의 약탈로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유봉과 송화, 동호가 약장수들과 싸우고 다시 길을 떠나면서 을 부르는 대목의 그곳이다. 전남 완도에서 뱃길로 40분 거리인 작은 섬인데, 청산도 선창에 내려 오른쪽으로 걸어서 1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당리마을의 당재 언덕에서 촬영되었다. 황톳길이 경운기가 다니기 불편하다는 주민들의 항의로 콘크리트로 포장되었다가 서편제 길 복원사업으로 다시 황톳길로 복원되었다. 어린 동호와 송화가 소리를 배우는지긋지긋해진 동호가 떠나고 그 뒤를 당산나무 옆에서 송화가 하염없이 바라본다. 전남 영광군 백수읍 지산리에 있는 당산나무인데, 오늘날까지도 이곳 주민들은 정월대보름 날이면 이 당산나무 아래에서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촬영당시 당산나무 주위는 허허벌판 이었는데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다고 한다.3)해남a.대둔사(대흥사):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수많은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는 절로 조선후기 연담유일(蓮潭有一), 초의의순(草衣意恂)등 유명한 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에 자리한 대둔사(大芚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절 이름은 1900년대 초에 대흥사(大興寺)로 되었다가 근래 다시 본래의 이름인 대둔사로 바뀌었다. 기록에 의하면 대흥사의 부속암자가 백여 개를 넘었다 하나 현재는 여섯에 불과하다.두륜산 중턱 해발 500미터 지점의 공터에 주막집 오픈세트를 지어 촬영했고, 대갓집 잔치에서 유봉이 어사 출두 대목을 부르는 장면이나 여관방에서 소리 준비하는 장면, 술 먹은 유봉이 북 치는 법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 등은 유선여관에서 촬영되었다.b.고천암 간척지: 세 사람이 해안을 따라 바람 부는 갈대 숲길을 걸어가는 장면의 갈대밭이 있는 곳. 황산면 징의리 고천암 배수갑문에서 고천암호 좌측길을 따라 1.5km쯤 가면 보통사람의 키를 넘어가는 수 십 만평의 갈대밭이 있다. 갈대밭길을 걷다가 1.2km의 방조제 둑에 올라 바닷바람으로 분위기를 전환할 수 도 있다.3. 한이란"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바로 사는 것" [동호]우리는 한의 발전과정, 문제의 발생(욕구충족의 실패) 소극적·감정적 대응 운명적 체념 미해결 문제로 고착 억울함· 절망감 恨한은 한국인의 사상을 설명함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한이란 한은 일차적으로는 자기에게 타격을 준 그 가해자에 대하여 반격·보복을 통한 설욕의 의지로서 부정적 속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끊과정을 통하여 한의 독소, 공격성과 퇴영성은 초극되어 미학적·윤리적 가치로 승화·발전되는 것이다. 즉 한국인은 자신의 한을 '삭이면서'살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으로 성숙하는 것이며, 그 '삭은' 한을 '푸는'과정에서 이를 즐기는 것이다. 한국적 한의 내재적 지향성으로서의 이 삭임의 기능이야말로 이른바 한국적 한의 진정한 고유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서편제 내에서의 한*유봉의 한: 명창의 수제자였던 자신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일생을 전전해야할 술집에서 송화가 희롱 당하는 것을 보아야만 했고, 천한 재인 소리를 들어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점점 맥을 못 추는 세상이 되어 가난을 감수하고 떠돌이가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명창이 되지 못했다는 것.동호의 한: 유봉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믿는 것. 가난과 판소리가 싫어 도망쳤지만 판소리의 매력을 끝내 잊지 못한 것.송화의 한: 그녀의 한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동호가 도망갔을 때 그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으로 한을 표현. 장님이 된 것에 대한 한은 오히려 표현하지 않음.4. 서편제의 문화 코드1) 북나무로 만든 북통의 양면에 가죽을 씌운 타악기로 전통음악의 여러 장르에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북이 사용된다. 궁중음악 등에 쓰이는 북은 모양과 크기, 색깔, 용도에 따라 다른 이름들이 붙어 있으나, 흔히 북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풍물에 사용되는 것을 가리키며, 판소리의 반주에 쓰이는 북은 특별히 '소리북'또는 '고장북'이라 한다. 풍물북의 경우 가죽을 메우는 방법이 조금씩 다른데, 쇠못으로 고정시키는 경우와 가죽끈으로 엮어 메우는 방법이 있고, 가죽끈으로 엮은 다음 쐐기를 박아 조이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소리북은 북통 전체를 가죽으로 덮어씌우는 점이 다른데, 이는 판소리 반주에서 북의 가죽 면뿐만 아니라 북통도 활용하기 때문이다. 소리북은 바닥에 편히 앉은 자세에서 소리북을 세로로 놓고 왼손으로 북을 살짝 잡은 다음 박달나무를 깎아서 만든 단단한 나무 채를 오른손에 들고 북면과 북통을 쳐서 소리낸다. 북통을 칠 고 하는데 이 고수는 장단을 쳐서 음악의 반주를 담당하는 것 외에도 필요에 따라 상황묘사를 위한 효과음을 내기도 한다. 즉, '얼씨구', '좋다', '좋지', '으이', '잘한다' 등의 '추임새'를 넣어 흥을 돋구는 역할을 아울러 한다2) 혁필화문자도 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좀더 자유롭고 정형화되지 않은, 사회구조의 질적변화와 맞물려 시민의 생활현실과 신앙에 맞게 발전된 것이다. 붓을 버리고 자유롭게 가죽으로 그리면서 우연과 추상성을 중시하고 손 가는 대로 즉흥적이며, 그림인지 글씬지 그 개념이 모호해진 단계에 이른 것인데, 뜻글자인 한자가 뜻하는 그림을 단순히 글자의 일부 점획, 또는 글자 전체를 대신하여 그린 순수 장식용 그림이다. 혁필은 1930년대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6.25전쟁 후에는 피난민 혁필화가 들이 많이 생겨 시골장터마다 볼 수 있을 정도였으나 1960년대 중반 이후 산업사회에서 일자리가 많이 생기고 인쇄 작품 등이 보편화 되어 급격히 감소되었다. 지금은 인사동이나 민속촌에서 주로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돈을 버는 혁필가 들이 있고 간혹 장터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몇 있다.3) 엿장수시골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로 엿판을 메고 가윗 소리를 내고 돌아다니면 동네 어린아이들은 저마다 종이, 빈 병, 쇠붙이, 머리카락 등을 가져와 엿가락과 바꿔갔다. 현재는 거의 사라진 형태고 가윗질 소리로 공연하는 엿장수가 있을 뿐이다.4) 인력거자전거 바퀴와 같이 생긴 구조의 큰 두 바퀴 위에 사람이 다는 자리를 만들어 그 위에 포장을 둘러씌워 만들었다. 1869년에 일본인 '다카야마 고스케' 등이 서양마차를 본떠 만들었으며 한국에는 1894년 '히나야마' 라는 일본인이 10대의 인력거를 수입해 들여와 영업을 함으로써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가마를 대신하는 중산층 이상의 교통수단으로 번성을 누렸으나 서민의 보행교통을 크게 방해하였고 중산층 이상이 주 고객이었기 때문에 횡포도 심했다. 1912년부터 등장한 임대승용차(택시)와의 경쟁에 밀려 점차 사양길을 밟았으거나 서양음악이 들어온 후에는 악단연주로 손님을 모았다.6) 창극말 그대로 창(소리)으로 엮어 가는 연극을 말한다. 19세기까지 전해오는 판소리가 20세기 이후 서양의 연극의 형태를 빌어서 무대화된 장르이다. 판소리가 한사람이 구연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면 창극은 등장인물이 여러 사람이라는 점이 다르다. 판소리에 아니리가 있듯이 창극에는 대사가 있는데 이러한 점은 서양의 오페라보다는 뮤지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창극은 1903년 가을에 원각사에서 공연된 춘향가로서 이때의 주인공은 이동백, 강용환, 송만갑, 김창호니, 강소향, 허금파 였다. 소규모의 관현악 반주에 맞춰서 소리를 하는데, 판소리의 사설과 가락을 그대로 실어 부르는 것(창극 춘향전, 적벽가, 흥보가등)과 옛날의 문학작품, 민담, 설화 등을 소재로 새 각본을 만들어 판소리 가락을 얹어 부르는 것 등이 있으며 최근에 와서는 새롭게 만들어 공연하는 창극 등이 있다.5. 전통주1)전남 담양 추성주(秋成酒)신선주(神仙酒)로 불리는 추성주(秋成酒). 찹쌀과 한약재를 함께 숙성시켜 전통기법으로 빚어낸 증류주(蒸溜酒)다.가사(歌辭)문학의 대가인 면암 송순(1493 1583)의 과거합격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잔칫날. 전국에서 모여든 선비들이 3일 동안 맘놓고 마셨으나 숙취가 없어 선비들이 극찬했던 것으로 문헌에 전해져 내려온다.만드는 방법은 우선 찹쌀과 멥쌀을 쪄 만든 고두밥에 엿기름과 물을 넣고 발효시킨다. 인근 추월산 에서 채취한 두충 구기자 음양곽 오미자 등 토속 한약재 13가지를 넣고 10일동안 숙성한다. 온도 65도에서 알코올만을 뽑아낸 뒤 40도로 식혔다가 다시 숙성하는 과정에서 한약재 6가지를 추가한다. 마지막으로 한약재 찌꺼기를 걸러 내고 대나무 숯으로 여과해 100일 이상 재워두면 된다.발효주가 아닌 증류주로 오래오래 묻어 둘수록 향이 배어 나 술맛이 감겨든다. 혈액순환과 신경통에 좋고 강장(强壯) 효과가 뛰어나다. 부드러운 한약 향과 순한 맛에 덜컥덜컥 마시다간 취기가 빠르게 올라온
박완서 소설에 나타나는 여성의 정체성緖論1. 소설가 박완서 소개■이력 -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숙명여고 졸업.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 25로 학업 중단. 1970년 마흔살의 나이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창작활동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한국의 현대소설을 대표하는 빛나는 작품들을 발표해왔다.한국문학작가상(1980)「그 가을의 사흘 동안」, 이상문학상(1981 「엄마의 말뚝」,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중앙문화대상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1997년에 대산문학상 등 수상.박완서는 리얼리스트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현실주의자다. 현실주의자로서의 박완서는 개인에게 상처로 각인된 분단만을 이야기한다. 박완서 문학에서의 분단은 그리고 그 분단을 낳은 전쟁은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분단의 원인을 알면 분단을 해소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분단이 해소됨으로 해서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상처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박완서는 그렇게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단의 원인을 찾지 않아도 전쟁의 원인을 찾지 않아도, 아니 찾음으로 해서 비로소 한 개인의 비극이 그 고통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바로 그럼으로써만 말이다. 이 점에서 박완서는 현실주의자다. 그는 '현실적'인 것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현실적인 것이란, 바로 박완서 개인의 '기억'과 체험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현실주의자로서의 박완서는 성급하게 화해하지 않는다. 성급한 화해는 결국은 지나간 모든 것의 용인이요,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함부로 자신의 고통을 전부의 고통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박완서는 부재하는 권력으로서의 부계를 그리고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부계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행사되는 권력이라는 점에서 박완서이다. 어찌할 수 없음이란, 바로 그 문제를 낳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박완서는 그 어찌할 수 없음을 드러내 준다. 이러한 어찌할 수 없음이란, 어쩌면 아무도 나아갈 수 없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을 보여줌이 어찌 소설의 몫이겠는가. 소설은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길찾기의 모색이다. 모색의 과정도 아니고, 그리고 모색의 결과도 아니다. 바로 모색 자체다. 그리고 그 모색이란 아무런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소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이 그렇다면 소설은 이미 자신을 넘어서 있다고 할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어찌할 수 없음 자체다. 그리고 이 어찌할 수 없음이 무엇으로부터 연유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박완서 문학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이든 이 지점에서는 '낙관적'이지 않다. 그의 소설의 끝은 낙관적일 수는 있지만, 그 낙관이야말로 아직 토대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박완서는 그 낙관의 비관성 또한 보여주는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외부와의 싸움과 아울러 내부와의 싸움을 얼마나 지독하게 겪어야만 할지 모른다. 박완서 문학은 그런 점에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빨리 문제로부터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박완서 문학의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그래 그들은 잘살 거야" 하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박완서는 그러한 믿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의 문학은 사람들을 편안함 속에서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소설가란 가장 못 가진 이, 가장 약한 이, 가장 억울한 이들과 동격이면서 한편 우리들의 인간답고자 하는 꿈과 힘을 억압하는 음흉한 세력에게, 그게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나 부나 이념이라 할지라도 거울을 들이대 그 하찮은 허구를 들어낼 수 있는 겁 없는 이라는 소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문학사상, 2000년 7월)2. 문제제기 및 연구 목서기의 과정에서 시대적, 사회적 곤란을 겪었던 여성들에 대해서도 보다 나은 총괄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무기력해진 가장 전쟁과 함께 바뀌어가는 가치관과 끈끈하게 이어져가는 모성애, 인간의 생명에 대한 작가 의식을 시대에 변화 속에서 작가가 인식하는 여성의 문제와 함께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고자 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하여 박완서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本論1. 소설의 인물[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는 작가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작가의 체험이 그대로 담겨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 소설을 살피는 것은 작가의 의식의 형성과정과 그 본질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1) 유년기[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책표지에는 "소설로 그린 자화상 유년의 기억"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그것은 작중인물의 삶이 자신의 유년시절의 삶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작중인물을 살펴보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하겠다.작중인물 '나'는 박적골에서 태어나고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은 무지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빠만은 공부시키겠다고 서울로 데리고 떠나신다. 작중인물은 그 후 조부모, 숙부모님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작중인물 나의 유년시절은 한마디로 '야성의 시기) 김윤식, [박완서-기억과 묘사],작가와의 대화 1996 P52'라 할 수 있다. 박적골은 태초의 고향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으면서 행복하게 자란다. 이러한 성장과정을 겪은 작중인물은 세상에 대해 거리를 두고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벽적골에 살던 '나'는 서울로 오게 되면서 겪게 되는 야성의 세계에대한 집착과 도시에 대한 거부감, 도시적 획일화에 대한 냉철한 비판의식, 생명존중의 세계관의 모태가 된다.2) 중년기박완서 작품에는 여성의 중년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많다. 그리고 그러한 소설 이 두작품은 결혼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부부 사이의 갈등과 여성이 받는 억압의 문제를 다루는 점에서 동질성을 갖는다.[살아있는 날의 시작]의 경우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자기 인식을 하는 경우이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의 문청희는 고학력의 여성이다. 전직 대학 시간강사에서 지금은 성업 중인 미장원과 미용학원을 운영하는 직업여성이다. 대학 교단에서 학원 원장으로 변화는 남편이 가지고 있는 '남성다움'과 거기에 순종해야하는 '여성다움'에 청희가 동의함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아내 문청희의 대응은 작품 전반부에 순응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문청희의 순응의 양상은 남편 정인철의 외도로 인해 여성다움의 껍질을 벗을 때까지 분노와 노여움 속에서도 이어진다. 약속에 늦은 인철에게 기다리는 동안의 분노와 노여움이 내면에서만 일어나고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참음의 과정을 거쳐 다소곳함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청희는 지식인 여성이다. 그러나 자기 인식에 있어서 그 지성은 아무 효과도 나타나지 못한다. 청희는 남편 정인철을 떠나서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는 평범한 주부인 것이다. 문청희에게 있어서 자주 나타나는 종속적 관계는 의식화 과정의 미흡이라는 구성상의 문제로 이어진다. 아내의 위치에 대해서 작가는 청희를 통해 '가정의 행복'으로 나타내고 있다.2) 여성성의 인식과 자아발견페미니즘 문학에서 여주인공이 자기만의 일을 갖거나 사회적 경제적인 자립을 통하여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부분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여성이 전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서 있는 것이 여성 문제의 결론인 듯 외향적인 방면으로 나아간다.[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는 70년대 작가로서 인간 상실에 대한 관념적 접근과 소시민적 삶의 모순을 깨닫게 하는 작가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여성문제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소설) 박태상, [개인적 소외와 집단적 소외] 국학자료원, 1993로 보고 있다. 본 작품은 사회의 도덕적 관습과의 갈등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첫째, 이혼녀로 아이 있다.3. 여성 소설과 박완서여성의 집필 재능은 풍속 소설에 가장 적합하다) A. Thibaudet, Le liseur 여 Roman(Paris : Librairie Cres, 1926) 제 1징 참조고 고 한다. 여자의 천부적인 꼼꼼한 성격이 디테일의 정밀 묘사나 풍속 묘사에 적합하기 때문에 연애소설은 여자의 참여폭이 가장 큰 장르이다. 하지만 여성의 소설이 모두 연애만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말은 모든 여성 소설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될 수 없다. 박완서는 사건의 일상성, 여성의 감성의 민감함, 풍속 묘사의 탁월함, 디테일 묘사의 정밀성 등의 특징으로 보아 전형적인 여성 양식의 소설가이지만, 그녀에게서는 낭만적인 사랑은 찾아보기 힘들다.박완서는 현실을 직시하려는 리얼리스트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다. 박완서의 소설에 나오는 남여 관계는 애인이 아니라 부부이며 그것도 사랑과 화합의 관계보다는 갈등과 불화의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남녀의 유대가 느슨한 반면 모자관계는 강세를 나타낸다. 그의 소설 속의 여인들은 여자이기 보다 어머니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는 항상 여인들의 모성성을 노출 시키는 것이다.그는 항상 모성을 발굴하려고 한다. 박완서는 여성 중심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고 여성적 양식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모계 문학의 전형일 뿐 아니라 가장 세련된 양식의 모계문학 작가이다) [문학사상] 109호 P 171라고 한다. 이는 동시에 7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라는 뜻이 된다. 또한 70년대는 여성문학의 정착기라고 할 수 있다.4.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작품 분석1) 줄거리외국에 나간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 차문경은 35세의 국민학교 교사로 아내와 사별한 김혁주와 만나 성관계를 갖고 연애를 하지만 김혁주는 모친인 황여사가 권해주는 대로 재색을 겸비한 정애숙과 결혼하고 만다.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안 문경은 김혁주에게 아이의 아버지임을 알리지만 김혁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친자임을 부인하다가 재혼한 처가 불임이 되자 이다.
풍수신앙의 이해緖論우리들은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현재 과학의 시대,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미신을 믿고 그것을 어느 정도 확신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풍수는 미신은 아니고 민간 신앙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민간 신앙이란 옛날부터 민간에 전승되어 오는 신앙 또는 그러한 종교를 말한다.이와 같이 민간의 생활 속에 전승되고 있는 자연 발생적 종교 현상을 민간 신앙으로 볼 때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신년제, 계절제, 가신신앙, 동신 신앙, 무속신앙, 독경신앙, 점복신앙, 동물신앙, 예조, 민간의료 등이 해당된다. 하지만 현재 이런 여러 민간신앙들 중 가장 유명하고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아마도 풍수일 것이다. 풍수설은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에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음양오행사상, 참위설 등과 연결되어 전한 말부터 후한에 걸쳐 인간의 운명이나 화복에 관한 각종 예언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다시 초기 도교의 성장에 따라 체계화되어 민간신앙으로 뿌리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전통적 사고를 지닌 한국인은 불확실한 자연현상과 불가시적인 초월적 세계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자연과 인간, 초월적 세계와 인간과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다.세계와 우주를 질서화할 의식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또 그러한 질서체계를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만들어진' 환경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구실을 한다. 인간의 공간이 질서화하지 않은 자연에 놓일 때에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질서화한 자연에 자리잡을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며 특별한 공간으로 성별된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공간은 의미와 질서를 지니는데, 이것의 정신적 활동이 풍수설로 구체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풍수설은 전통사회에서 삶의 긍정적 표현인 동시에 생동적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것이 신앙체계로 자리 옰김을 하여 풍수신앙이라는 신앙적 영역을 확보하는 한편,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크게 좌우하고 있다. 중국에서 전래되어 우리나라로 도입되면서 특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주거 선정이나 취락 입지의 방법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영안의 장소를 찾는 일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독창적인 문화현상이라고 할 만하다.여기서 이러한 풍수신앙에 대해 이해해 보기로 하겠다.本論Ⅰ.묘지 풍수신앙이 풍수설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에 사는 집터라 든 가 도읍터 등을 보는 양기와 죽은 후에 장사를 지내는 묘지를 보는 음택으로 나뉘는데 흔히 풍수라고 하면 일반적인 생각으로 양기보다 음택을 의미한다고 많이 생각한다. 이렇듯 풍수 하면 음택을 많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집터를 보는 양기보다 묘지를 보는 음택을 더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사람이 죽어서 땅에 묻히면 살은 썩어 흙으로 화 하지만 뼈는 영원히 남고, 그 뼈에서 발하는 정기가 자손들의 화복과 관계된다는 데서 음택을 더 소중히 여긴 것이다.그 예로 지관을 들 수 있는데 지관은 왕가의 능을 점지했던 당대 최고의 풍수사로, 조선 시대에는 음양과를 합격한 풍수사 중에서 3 4명만을 선정하였다고 한다. 왕릉을 점지할 필요가 있을 때만 임명되던 임시직이었으나. 해임된 뒤에도 '나라가 인정한 최고의 풍수사'라는 뜻에서 '지관'이라 부르며 예우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조상과 부모의 유해를 길지에 매장함으로써 그 목적을 성취하려는 집념이 유독 강하다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다른 문화와 구별된다. 또 혈족 중심의 가족제도 사회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질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풍수신앙이다.몇가지 에를 들어 음택이란 어떤 것인지 이해를 돕도록 하겠다.ⅰ)소형국소형국누운 소 모양(臥牛形), 황소가 강을 건너는 모양(黃牛渡江形), 엎드린 소 모양(伏牛形) 등의 형국이다. 소는 하늘의 뜻을 알리는 영물이라 하며, 농가 재산 1호이다. 평화, 태평, 풍요를 의미하며 음택이 소의 형국이면 자손이 부자가 된다고 한다.ⅱ)호랑이 형국엎드린 범 모양(伏虎形), 범이 숲에서 나오는 모양(猛虎出林形), 범 꼬리 모양(虎尾形), 흰 범 모양(白虎形) 등의 형국이다. 호랑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령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마귀나 잡귀를 물리친다고 한다. 산신의 지시를 받아 인간의 길흉화복을 깊이 생각하는 뜻을 지니며, 음택이 호랑이 형국 이면 벼슬을 얻음을 뜻한다.호랑이 형국이렇게 묘지 풍수신앙은 당시 사회 모습과 토속신앙과도 밀접한 관계를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일반화된 관념으로 볼 때 풍수란 묘지의 길흉을 점치는 법술로 인식되어 있다.그러나 풍수가 전해지던 초기에는 묘지뿐 아니라 집터를 보거나 나라의 복을 빌고, 수호하고 적들을 진압하고자 탑을 세우는 등 많은 곳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풍수 하면 묘지를 점지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묘지풍수신앙은 종래 민간사이에 깊고 넓게 그 세력을 확장하여 우리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Ⅱ.서울로 보는 풍수신앙풍수신앙은 신라시대에 우리나라로 전래된 이래로 집에서부터 묘지까지 포괄적 의미의 생활터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특히 풍수지리에 맞게 들어선 여러도시들(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등)은 수백년이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공간구조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서울의 공간구조 형성에 미친 풍수신앙의 영향을 통해 풍수사상의 공간개념을 밝혀보고자 한다.1405년 조선왕조가 열린 지 13년이 지 나도록 서울과 개성을 오가며 도읍지를 확정 못짓다가 마침내 서울을 도읍으로 확정짓게된다. 정도전, 무학대사등의 노력으로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한 것이다.가장 기본적인 풍수지리의 개념중 하나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 따르면, 한양은 북한산에서 내려다 볼 때 앞에 한강과 뒷편의 북악산이 자리잡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혈(穴)에 해당하는 지점에 도읍지를 세워 궁궐을 지었다 더욱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북한산을 주산(主山)로 삼고, 안산(案山)을 남산으로 하고 있으며, 관악산을 조산(朝山)으로 볼 수 있다. 한양의 좌청룡(左靑虎) 우백호(右白虎)는 각각 낙산과 인왕산을 가르킨다. 그리고 4대문 밖에는 한양을 감싸는 듯이 둘러싼 산-노고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용마봉, 대모산, 관악산, 구룡산, 덕양 산등 -들이 위치하고 있다. 경복궁의 터를 잡을 때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남향을 주장했으나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동향을 고집했다고 한다. 또 무학대사는 신라 의명대사의 비기를 인용해서, 한양에 도읍을 할 때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대로 하면 그 왕조는 5대를 못 가서 왕위를 찬탈하는 변이 생길 것이요, 이 백년 안에 전국이 도륙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정도전의 의견대로 하였고, 무학대사가 두고 보라고 한 대로 6대 왕인 단종 때 왕위 찬탈 사건이 일어나고 건국 200년 만인 선조 때 임진왜란이 생겨 팔도가 살육의 전화에 휘말렸었다. 그리고 경복궁이 자리잡을 때 불의 형상을 한 관악산을 마주보고 있어서 도성에 재난이 많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경복궁에는 유독 불을 먹는다는 해태를 많이 만들어 세운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황도와 황궁의 위치를 결정하는데 풍수신앙이 깊게 자리 잡은 것을 볼 수 있다.대동여 지도중 서울Ⅲ. 풍수의 본질(本質)풍수의 본질은 생기(生氣)와 감응(感應) 이 두 가지이다. 우주는 음양이란 양기(兩氣)가 정기(精氣)로 되어 활동함으로써 생기는 것 이므로 기(氣)를 생기라 한고. 또한 만물은 이 생기에 따라 성쇠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동일한 생기에서 생긴 것이면서도 만물은 모두 제각기의 특색과 운명을 가지게 된다. 사람도 이 정기(精氣), 즉 음양오행의 생기에 의해 나타나며, 생기에 의해 삶을 유지하고, 생기를 입는 일의 다소에 따라 그 운명을 달리 하는 점은 다른 만물과 차이가 없고 본다. 예컨대 요절하는 자는 이 생기의 누림이 적은 것이며 장수하는 자는 생기의 누림이 큰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귀천의 강약, 빈부, 성쇠 등은 이 생기를 받음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기(氣) 인생만물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이 풍수설의 본질인 것이다.풍수에서는 부자(父子)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부모의 행복과 불행이 자식의 행복과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부모의 유골과 자식간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부모의 유골 이 기를 받으면 그 자손도 행운을 받는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기가 땅 속의 기에 닿으면 부모 자식 사이에 감응이 생겨 생기의 효과가 자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풍수의 본질은 천지와 부자간의 기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본질에서 출발하여 인간세상의 행복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것이 풍수의 요체인 것 이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경어법 대조머릿말전 세계에는 수천 개나 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인류가 사용하는 이 언어들은 의사 전달 수단으로서 공통적, 보편적 성질을 지니고 있는 반면, 개별 언어들은 각각 독자적인 특질을 지닌다. 필수적인 외국어인 영어를 배우면서 우리말과는 다른 어순 때문에 누구나 배우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일본어는 같은 어순 때문에 배우기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본어를 습득함에 있어 비슷한 어순이 항상 장점으로만 느껴지는 것인가 비슷한 부분이 학습자로 하여금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관계들을 밝히는 작업은 외국어 교육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제이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대조연구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한국어와 일본어는 문법구조가 비슷하지만 특히 경어가 발달한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경어법은 어떤 대상을 얼마나 높여 대우하고 낮추어 대우하는가를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체계이다. 일본 격언에 '말씨는 마음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사나, 선배, 동료, 후배 또는 고객을 대하는 태도 등에서 어휘의 사용법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 언어 중에서도 우리말과 일본어처럼 보통어와 경어의 구별이 심한 나라는 드물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대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생각으로 일본어와 한국어의 경어의 대조분석과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어 교육 시 중점을 둘 사항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