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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여성가족부의 설립 이유와 폐지
    여성가족부의 설립 이유와 폐지
    여성가족부의 설립 목적과 폐지여성가족부의 역사적 배경은 1995년 UN 주관으로 열린 세계적인 여성운동, 다른 말로는 베이징 여성대회가 열리게 된다. 이 여성운동에서는 ‘여성이 보호적 대상을 넘어 남성의 사회적 동반자로 성장해야 한다’라는 내용을 담은 베이징 선언과 행동 강령이 공식화되었다. 이 운동의 영향으로 세계 각국에 장관급 여성정책 관할부처, ‘여성부’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대한민국 또한 영향을 받게 되어 여성부가 형성되었다.여성가족부는 1997년 김대중 정부 시기에 탄생하게 되었다. 본래 여성 및 성평등 관련 정책은 1988년부터 제2정무장관실에서 담당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여성부 신설은 역사의 흐름이며, 여성이 남성과 대등하게 국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며 제15대 대선에 공약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2001년 1월 29일에 여성부라는 중앙행정기관이 신설되었다. 이때의 여성부는 여성정책의 총괄, 조정, 남녀차별의 금지, 규제 등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했다. 보건복지부로부터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 보호, 성매매의 장지 업무 및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업무를 이관했다. 또 노동부로부터 하는 여성의 집 업무를 여성부로 이관했다. 2004년 6월에 보건복지부로부터 영유아 보육업무를 이관하였고, 2005년 6월 노무현 정부 시절에 여성 정책 뿐만 아니라 가족정책을 수립, 총괄 및 영유아 보육을 지원하는 여성가족부로 개편되었다. 이때 남녀차별금지법 관련 업무를 국가인권위원회로 이관, 보건복지부로부터 가족 업무를 이관 받았다. 2008년 2월 29일 또다시 여성부로 여성정책의 총괄, 조정, 여성의 권익증진 등 지위향상을 돕게 되었다. 2010년 3월에 보건복지가족부의 청소년 및 다문화가족을 포함한 가족 기능을 갖춘 여성가족부로 재개편 되어, 여성발전기본법에서 양성평등기본법으로 전부 개정하였고, 보건복지가족부로부터 가족, 청소년 업무를 이관 받았다.여성가족부의 탄생은 정치적 환경과 이해관계로 확장과 축소가 반복되었다. 김대중 정부에 탄생하게 되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성가족부의 폐지 여론이 끊임없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여성가족부의 존재감은 크게 상실되었다. 또 많은 공무원들을 퇴출당하게 되었다. 이후 여성정책에 친화적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성주의 관점의 정책들이 조금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오늘날 윤석열 정부가 새롭게 시작되면서 여성가족부의 폐지 여론은 또 다시 시작되었다.오늘날의 여성가족부의 설립 목적과 주요 업무는 여성정책의 기획, 종합 및 여성의 권익증진으로 여성정책의 총괄, 조정하여 여성의 사회참여를 확대시키며, 양성평등 문화를 확산시키고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 촉진을 도와준다. 청소년 활동, 복지 지원 및 보호로 청소년 정책의 총괄, 조정을 하며 유해환경으로부터의 청소년 보호, 청소년 활동 진흥 및 역량 개발에 힘을 쓴다. 가족 및 다문화가족 정책의 수립, 조정, 지원은 가족 및 다문화 가족정책의 총괄, 조정하며 한부모 가족의 자립 지원, 다문화 가족의 사회통합을 지원한다. 마지막으로 여성, 아동, 청소년에 대한 폭력피해 예방 및 보호는 성희롱,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가정폭력 방지, 아동, 청소년 성범죄 예방 및 보호, 디지털 성범죄 방지 등에 도움을 주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위의 조직도는 오늘날 여성가족부의 조직 및 기능이다. 크게 정책기획관, 여성정책국, 청소년정책관, 가족정책관, 권익증진국으로 나누어 설립 목적을 시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여성가족부의 장관들은 모두 여자였다. 초대 여성부 장관은 한명숙으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여성이 적극 참여해 여성의 힘으로 양성평등 사회를 주체적으로 열어 가기를 바란다.” 라며 당부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2대 여성부 장관은 지은희 전 장관이다. 3대 여성부 장관인 장하진 전 장관은 한국여성연구소장, 한국여성연구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한 학계의 여성 문제 전문가였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조윤선 전 장관이 여성가족부의 장관이 되었고, 문재인 대통령 정부때는 정현백 전 장관이 여성가족부의 장관을 이어갔다. 정현백 전 장관은 ‘여성운동의 대모’라고도 불리며, 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등을 역임했다. 여성가족부 폐지론과 관련해 정현백 전 장관은 2022년 여성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여성가족부의 폐지론, 페미니스트들이 남녀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는 비난도 난무하고 있다며 비판을 보이기도 했다.윤석열 대통령은 여성가족부의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성가족부의 장관은 김현숙이 되었다. 김현숙은 여성가족부 장관 취임식에서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인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은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사회 구현’을 위해, 아이 돌봄 서비스 지원 강화를 통한 맞벌이 가구 등 양육공백 최소화 및 정부 재정지원 확대로 양육비용 부담 경감을 목표로 한 아이 돌봄 서비스 지원 강화, 한부모 다문화 등 다양한 가족 지원, 범죄 피해자 보호, 지원 관련 모든 제도를 피해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목표를 지닌 5대 폭력 피해자 보호,지원 강화과제, 학업중단 청소년 정보연계 강화, 진로, 직업 교육훈련 확대, 청소년 위기 유형별 맞춤형 지원을 위한 청소년 안전망 강화를 위한 학교 밖 위기 청소년 맞춤형 지원에 집중하겠다고 이야기했다.하지만 김현숙은 여성가족부의 폐지를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며 여성가족부 TF팀을 출범시켰다. 김현숙은 ‘기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능과 역할을 어떻게 새롭게 수행하고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실상 여성가족부의 폐지나 개편을 위한 장관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오늘날 여성가족부의 폐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10월 14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미디어토마토에서 만 18세 이상 남녀 1050명을 대상으로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폐지에 대해 반대한다는 48.7%, 찬성은 42.7%였다. 남성과 여성으로는 남성 찬성은 48.1%, 반대 43.6%, 여성 반대는 53.7%, 찬성 37.4%로 반대가 월등히 높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여성가족부 폐지 찬성 중에서 주요 이유는 예산 낭비, 여성가족부의 운영방식 문제, 여성가족부 이념과 정치 편향적, 남녀평등을 막음, 급진 페미니즘 이념을 실행, 행정력과 혈세를 낭비하는 등의 이유였다. 관리감독 없이 여성 단체 지원 등 여성가족부의 성평등을 위한 목적이 아닌 다른 곳에 사용되는 예산이 많다고 한다. 여성가족부의 예산은 2017년 기준 정부 전체 예산인 400조 5000억 원 중 0.18%인 7122억원에 불가하다. 적은 예산으로 낭비하고 있다는 말은 신비성이 없는 말이다. 이후 1조 2천억원 정도의 예산이 확정되었으며, 실제로 1조 이상의 비용이 가족과 청소년 관련 예산에 들어갔다고 한다.또 다른 폐지 찬성 이유 중에서 남녀평등을 막는다는 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다. 여성가족부의 영문 명칭은 ‘성평등가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이다. 한문 명칭인 여성가족부는 특정 성을 내거는 것으로 여성만을 위한 부처라는 편견을 조장하여 남녀평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쉽다. 하지만 위의 그림에 나와있는 조직도만 보아도 여성가족부는 기능 중심의 다른 부처와는 달리 대상 중심의 부처로, 여성, 가족, 청소년에 대상을 맞추어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여성을 위한 부처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위해 필요한 부처이다. 이러한 명칭에 대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해당 부처의 정체성을 표출하고, 양성의 경계를 넘어 인권 전체를 아우르는 평등적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여성가족부의 슬로건은 2018년부터 ‘평등을 일상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 슬로건 또한 여성에 편향되어 남녀 평등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여성가족부는 여성뿐만 아니라 가족, 청소년을 위한 부처이다. 즉 가족과 여성, 청소년 모두를 위하는 슬로건을 새롭게 내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또한 폐지 찬성 이유 중 하나인, 여성가족부가 시행하고 있는 정책을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로 이관시킨다면 여성가족부의 존재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때 여성가족부를 보건복지부에 합병하자는 주장이 거세게 나왔다. 하지만 과거에 보건복지부에서 가족의 정책이 여성부로 옮겨오면서 여성가족부가 완성되었다. 보건복지부는 의료 및 구제 활동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족과 여성의 근본적인 문제가 합쳐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지금까지 여성가족부 폐지 찬성에 대한 이유를 먼저 찾아보았고 그에 대한 이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았다. 그 결과, 나는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해 반대한다. 여성가족부 폐지 찬성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국민들이 여성만을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를 폐지시킬 때는 부처 기능의 필요성을 따져야 한다. 여성가족부의 폐지 언급이 나올 때에는 먼저 여성가족부의 기능과 업무에 대한 분석 등 실익여부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먼저 나온 이유는 바로 여성으로 치우쳐진 불평등이었다. 또한 이미 여성을 보호할 기구가 불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많은 여성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n번방 사건이다. n번방 사건 때 여성가족부에서는 피해 여성을 위해 힘을 썼고, 아직까지 성폭력이 존재하므로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책을 담당하는 부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물론 앞서 말했듯이 여성가족부에서 가진 문제점은 분명 있다. 여성가족부 또한 무조건적인 폐지 반대를 주장하지 않고, 문제점에 대해 인정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가족부는 모든 국민에게 필요한 부처라고 생각하기에 폐지 되지 않고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사회과학| 2023.09.26| 5페이지| 2,500원| 조회(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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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 독후감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 독후감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오늘날 우리나라의 행정은 미국에 기반을 두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역사 등 발전과정을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고른 딱 하나의 기준은 미국사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책이었다. 여러 미국사책들 중에서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를 선택하였다. 책이 좀 두꺼운 편이였지만, 책의 표지에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서 트럼프 행정부’까지 라는 글을 보자마자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표지에 적힌 것과 같이 첫 시작부터 최근 행정부까지의 많은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오늘날 미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강대국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고의 강대국으로 오기까지의 약 500년 간 보내온 미국의 역사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잘 정리되어 있었고,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미국의 역사와 문화, 이슈를 한 번에 읽어 볼 수 있었다.책의 첫 내용은 본래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의 장착인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내용으로 시작이 되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 시베리아 지방에 살던 몽골계 아시아인들이 배랑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오게 되었다. 이들은 북아메리카에서 중앙아메라카, 남아메리카로 광범위하게 흩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마야, 잉카, 아즈텍 문명을 창조 시키기도 했다. 이후 15세기에 콜롬버스는 대항해를 떠났고,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스페인은 아즈텍 제국에 보물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즈텍 제국의 수도를 공격했다. 스페인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를 정복하였고, 이를 보고 있던 영국도 식민지를 건설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영국 또한 북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을 시작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경제적 목적으로 식민지가 시작되었고, 종교적 목적으로는 북부 식민지가 시작되었다. 영국은 방임정책을 바탕으로 식민지에 대해 무간섭 하였고, 식민지인들의 자치권 등을 인정하며 평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기간 이어진 전쟁으로 영국은 국가적으로 많은 빚을 키는지에 대한 여부 등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처럼 많은 논쟁과 협상을 통해 1787년 9월 미국 헌법의 확정 초안이 마련되었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 헌법의 본보기가 된 미국 헌법은 크게 주요 특징 3가지를 지니고 있다. 첫째.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한 삼권분립을 보여준다. 이는 참 올바른 제도라고 생각한다.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된다면 한사람이 나라의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는 독재정치가 일어날 것이다. 나라의 권력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도와주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데 탁월한 정치형태라고 생각한다. 둘째. 국가의 기반이 ‘나라’또는 ‘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국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법의 지배라는 사상을 제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헌법이 국가의 최고의 법이며 모든 법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 또한 대표들끼리 마음대로 헌법을 만들었다면 독재 정치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헌법안이 국민들의 동의를 받아야 통과가 가능하다. 이처럼 여러 나라 헌법의 본보기인 미국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이 세가지의 특징을 담아 헌법이 제정되었고 연방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투표도 진행되었다. 연방의회의 주도로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이 취임 되었다. 국무장관으로는 토머스 제퍼슨, 재무장관으로는 알렉산더 해밀턴이 임명되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실패한 정책은 바로 ‘출항금지법’이다. 유럽에서 나폴레옹전쟁이 재발되었다. 전쟁 초기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와의 무역에서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전쟁을 치르면서 영국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당시 대통령 제퍼슨은 출항금지법이라는 소극적인 정책을 대응했지만 이 정책은 오히려 미국의 무역을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만들었고, 이후에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노예제는 인도주의적 성향을 지닌 북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북부 노예 폐지 운동을 시작했지만 남부인들과 일부 북부 백인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이처럼 북부인과 남부인 사자의 10퍼센트가 연방에 충성을 서약한다면 새로운 주 정부를 세울 수 있게 하겠다는 관대한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3개 주에서 새로운 주 정부가 세워졌지만 공화당을 온건파, 급진파로 갈라 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링컨의 10퍼센트 계획은 옳은 계획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란을 일으켰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민으로써 한번의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863년 노예 해방 선언, 1865년 수정헌법 제 13조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19세기 미국은 산업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필수적 요소인 기술 혁신은 19세기 후반에 두드러져 산업 발전을 이끌어 나갔다. 20세기 초에는 혁신주의자들에 의해 혁신주의 운동이 진행되었다. 혁신주의자들은 정치 분야에서도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이들의 노력으로 주민발의제, 주민투표제, 예비선거제 등이 추진되었다. 혁신주의 시대에서의 가장 큰 운동은 바로 여성참정권 운동이라고 한다. 여성은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전국여성참정권협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남성 중심 사회에서 평등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결국 1920년 여성들은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 19조의 제정을 이끌어 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으로 운동을 벌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노력으로 오늘날의 남녀 평등사회가 오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한편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미국은 미국 내에서 충돌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중립을 선언했으나 계속되는 독일의 도발에 결국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미국의 참전은 연합국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큰 변화들이 생겼다. 전쟁에 참여한 모든 나라가 전쟁 채무와 배상금 문제를 가져야했다. 하지만 미국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바뀌어, 세계의 주도적인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후 미국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즐겼지만, 1929년 월스트리트를 붕괴시킨 암흑의 화요일, 대공 목적으로 한 정책일 뿐, 정확히 어떠한 정책이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1933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또 한 번 중립을 유지했지만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을 받아 냈다. 독일의 항복 이후에도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에서 끊임없이 전투를 펼쳤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여하자 일본도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미국은 소련 봉쇄 정책을 발표하고 유럽의 경제 재건을 돕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때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이 발발하였지만 공산당의 승리로 중국은 공산화가 되었다. 1950년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시작했다. 이렇게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미국은 이를 방치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으로 보아 남측을 돕고, 소련과 중국은 북측을 도왔다. 미국과 소련간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 내에서는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확대되었지만 소련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고, 부시 대통령의 재임 시기를 거쳐 1991년 소련연방의 해체로 영원한 종식을 맞이하게 되었다.1980년 보수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작은 정부를 지향한 ‘레이거노믹스’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의 핵심은 세금 삭감과 연방 지출의 축소였다. 하지만 세금 삭감과 국방비 정책으로 인한 재정위기가 찾아왔고 미국 사회는 점차 양극화되어가고 있었다. 1989년 부시 대통령이 취임 후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냉전이 종식되었다. 또 걸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부시 대통령은 재임 중 국민들의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은 레이건의 정책이었던 레이거노믹스의 기본 틀을 유지하여 국내 정책을 펼쳤다. 그는 교육에도 힘을 기울이는 등 여러모로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냉전이 끝난 후 민족과 종교를 둘러싼 발칸반도에서의 충돌, 대된 수색, 압수, 구금 권한을 갖게 되었다. 2002년에는 내외국인 국경 출입 관련 기관 22개를 통합해 국토안보부라는 부서를 창설했다. 2008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전임 부시 대통령이 남겨 놓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골모해야 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대공황에 비견될 만한 심각한 경제 위기였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외 정책은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에서 벗어나 커다란 변화를 시사하는 ‘단절’과 ‘재조정’이라는 용어를 써가며 ‘새로운 시대’를 열 것임을 천명했다. 그는 바로 부자 감세를 돌려놓고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힘썼으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참여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그는 바로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며 오바마 케어 폐지시도, 강력한 이민 억제 정책,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탈퇴 등 파란을 일으켰다. 북한의 핵 문제 또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2018년 싱가포르에서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서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 보장, 북미 관계 정상화 추진 등을 합의했지만 북한은 비핵화와 관련된 조치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북미 양측 간의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으로 미국의 통합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으로 자국 우선주의로 변화하여 미국의 통합은 다시 어려워졌다. 하지만 현재 바이든 대통령 또한 ‘통합’을 강조했기 때문에 앞으로의 미국의 변화가 궁금해진다.미국은 원주민의 역사부터 아메리카 혁명, 남북전쟁, 제1차 세계대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다양한 위기를 거쳐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미국의500년 역사는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러 경제난, 전쟁, 문화의 발달, 다인종 국가로 인한 인종차별 문제등을 긍정적으로 잘 헤쳐 나가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너무 많았다. 미국사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 싶다.
    독후감/창작| 2023.09.26| 5페이지| 2,500원| 조회(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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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평등 채용 제도
    양성평등 고용제도우리나라에서는 공무원 채용관련에 따라 2003년부터 양성평등채용 목표제도를 시행되고 있다. 양성평등채용 목표제란 성비 불균형 해소를 위해 남녀 양쪽에 최소 채용 비율을 설정하는 제도로, 어느 한쪽 성별 합격자가 합격예정인원의 30% 미만일 경우, 해당 성별 응시자를 추가 합격시키는 제도이다. 즉 공무원 등의 채용시험에서 성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남성이든, 여성이든 한쪽이 합격자의 70%를 넘지 않게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모든 공무원 시험에 적용되지 않고, 안신혁신처에서 시행하는 선발 시험 중 선발예정인원이 5명 이상 모집단위에 적용된다.이 제도의 목표는 여성과 남성의 채용 비율이 동일하여 평등한 공무원 임용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당시 여성 공무원 채용율이 10%로 인하여 여성 채용을 확대해 우수한 여성인재들을 정부로 받아들여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제도의 기존 이름은 여성채용목표제였다. 하지만 군가산점 폐지 이후에 여성채용 비율이 70%를 넘기며 행정부는 양성평등채용 목표제로 보완하였다.위의 2개의 표와 같이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여성 공무원의 비율은 47.9%이다. 아래의 표와 같이 2003년도부터 양성평등채용 목표제가 실시되며, 여성 공무원의 비율은 계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고위관리직 여성 공무원 비율은 낮은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 2022년도 기준 여성 고위직 공무원 비율은 10%대를 나타나고 있다. 아래의 표와 같이 여성 고위직 공무원 비율이 꾸준히 늘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OCED 평균인 37.1%의 절반도 미치지못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제도는 과거 남아선호사상으로부터 시작되어 낮은 여성채용비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과거에는 임신과 육아 등으로 사회와 단절된 여성의 사례는 매우 많았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는 공공부문 의사결정 직위의 성별균형 수준이 OECD 주요국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 제도는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여성 참여확대의 성과가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 제도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유리한 제도라 하며,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유리한 제도라고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여성을 위한 제도로 인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어느 특정 성에게 유리한 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 비율이 30% 미만일 경우 남성이 추가 합격되기 때문에 누구에게 유리한 제도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부정적인 인식이 생긴 이유는 사회 전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여성 차별로 인하여 이러한 문제가 발생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별에 관한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성에게는 과거 심했던 여성차별을 벗어나 현재 정부에서 지원하는 많은 여성 정책을 알려 더 이상의 성차별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며, 남성에게는 여성 정책에 따른 남성 정책을 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남성 피해의식도 최소화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양성평등채용 목표제는 성비 불균형 해소를 위한 제도이며, 더 나아가 여성 고위직 공무원 비율을 높이기 위한 제도이다. 어떤 특정 성을 위한 제도가 아니며, 현대 사회에 충분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양성평등채용 목표제를 폐지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제도를 폐지하게 된다면 다음에 어떠한 양성평등 정책이 나오더라도 시민들은 올바른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폐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성차별 인식을 개선시켜야 하며, 제도에 관한 인식도 좀 더 다각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차별 인식이 사라진다면, 또다른 양성평등 정책에 관하여 시민 모두가 옳고 그름이 분명하게 반박하고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래에는 남녀가 함께 공유하는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 2023.09.26| 3페이지| 2,500원| 조회(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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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십 이론_넬슨 제독
    호레이쇼 넬슨의 일생과 삶에 대한 고찰목차 -영국의 영웅, 넬슨 제독넬슨 제독의 생애와 활동넬슨 제독의 삶과 가치관영국의 영웅, 넬슨 제독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 나는 방향성을 상실했다는 생각을 한다. 단기적인 목표만을 보고 달려오다 보면 내가 가야하는 전체적인 방향을 잃을 때가 있다. 인생의 갈피를 잡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쉬운 방법은 나와 목표의 결이 같은 성공한 인물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다.[많은 훌륭한 인물이 있지만 내가 롤 모델로 선정한 인물은 넬슨 제독이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일생과 일신을 받쳤으며 결국 그 의무를 다하고 영광스러운 목표를 달성한 인물이다. 그의 목표와 의무는 대의에 명분이 있기 때문에 내가 추구하는 비교적 소박한 그것과는 차이가 있으나, 그의 리더십과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그의 애국심과 의무감에 기반한 삶의 방식이 내가 원하는 인생관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롤모델로 선정하게 되었다.]> 서론 활용넬슨 제독의 생애와 활동산업 혁명 이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북미 쪽을 지배하며 대립 구도를 이뤘다. 대립은 1763년 영국과 프랑스의 파리조약 이후 프랑스가 북미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영국이 식민지 경영의 선두주자가 되며 끝이 났다. 이 후 계속되는 영국과 프랑스의 접전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끌며 바다의 제패자로 만드는 일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넬슨 제독이다. 그의 주된 해전은 다음과 같다.첫째로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이 있다. 1797년 일어난 이 해전은 넬슨에게 기사의 작위를 안겨준 해전이다. 당시 스페인과 프랑스의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던 넬슨은 두 함대가 합류되기 전에 스페인 함대를 먼저 저지하여 공격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본진과 후방을 별도로 공격했다. 상관은 이를 반대했기에 넬슨의 행동은 상관명령 불복종이었으나 넬슨은 스페인 함대에 올라타 싸우는 등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며 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그로 인해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력이 약화되어 영국이 다시 지중해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스페인은 남아메리카 지역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 해전 이후 스페인의 무적함대 명성이 깨지며 식민국가들이 독립선언을 하게 된다.둘째로 1798년, 나일 해전이 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이 지도자로 교체되는 상황이었다. 또, 해전 경험이 풍부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혁명으로 인한 잦은 정권 교체로 해군 수뇌부 또한 자주 교체가 이루어져 해군의 전체적 능력치가 높지 않았다. 때문에 프랑스는 영국과의 전면전 대신 영국이 지배하는 인도를 공략하여 영국에 타격을 주고자 했다. 프랑스 군의 정확한 정박지를 알지 못한 영국이 넬슨에게 이를 알아내라고 지시하였고 넬슨은 73일의 추적 > “특성이론 반박시 사용”을 통해 프랑스의 함대가 알렉산드리아로 모인 것을 알게 된다. 프랑스 함대의 수가 많았기에 전체를 다 상대하는 것은 어려웠기에 전체를 다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육지에 식량과 식수를 공급하려 대규모의 군사가 빠져나간 때를 노려 대승했다. 특히 넬슨은 프랑스의 전술을 미리 파악하고 프랑스 배를 가운데에 가둔 채 양 옆에서 공격을 했다. 당시 많은 군사가 육지에 있어 인력이 부족했던 프랑스 군은 반대편의 대포를 쏠 수 없었기에 넬슨의 군대를 막을 수 없었다. 넬슨은 군사들에게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율권을 많이 주는 편이었고 이 덕분에 프랑스 배를 둘러싸고 공격하는 성공적인 전략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 리더십 이론에 사용이후 영국은 지중해 지역을 완전 장악했고 나폴레옹에게 첫 패배를 안겨줬다. 이 전투 이후로 나폴레옹을 두려워하던 타 국가들이 영국과 동맹을 맺는 등 유럽의 외교 정세가 영국으로 기울어졌고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발발할 시, 타국이 최소한 프랑스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영국에게 큰 의의가 되었다. 더불어 넬슨은 남작의 칭호를 얻게 된다.마지막으로 넬슨 제독이 사망한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이 있다. 재집권한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구상한다. 그러나 전면전으로는 영국의 해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프랑스와 스페인이 연합하여 영국군의 유인하는 전략을 펼친다. 프랑스 군이 전략적으로 서인도를 먼저 공격하자 넬슨이 이를 방어하러 쫓아 트라팔가르 곶에서 격돌하게 된다. 이 때 프랑스는 1열 종대로 함대를 배치했으나, 넬슨은 2열 종대로 함대를 배치하여 대포의 타격을 받으면서도 프랑스 군의 대열을 뚫고 들어가 공격한다. 이는 전에 없던 전술로 후대에 “넬슨 터치”라 불리며 이후 100년 간 영국이 전 세계 바다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은 무산되었고 넬슨은 이 전쟁에서 “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으나, 해가지지 않는 나라의 칭호를 영국에게 안겨주었다.넬슨 제독의 삶과 가치관그가 남긴 것은 단순히 승리만이 아니다. 지금부터 그가 남긴 본받을 만한 가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넬슨 제독이 발휘한 신뢰 기반의 리더십이 그 첫번째 가치이다. 그는 군대라는 분위기 속에서도 지시 이행을 명령하기보다 부하들의 의견을 묻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부하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전시 상황에서의 시그널 전달보다도 큰 그림만을 그려주고 부하들이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자율권을 주는 상관이었다. 그의 리더십은 신뢰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부하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의견을 믿기 때문에 그들과 토론을 하고 자율권을 부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신뢰는 부하들에게서 유대감과 전우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 행위이론에 사용대부분의 리더들은 상황에 따른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서 조직원에게 정해진 틀을 강요한다. 또 그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조직원을 눈엣가시로 보기도 한다. 이는 이익추구가 목적인 조직 외에 부자지간, 사제지간, 연인관계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문제이다. 주 원인은 타인에 대한 신뢰 부족이라고 본다. 타인이 변화하는 상황에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없다는 불신이 바탕이 되어 그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것이 꺼려지는 것이다.나 또한 타인을 쉽게 믿는 편이 아니다. 불신은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을 의심하게 하고 의견을 무시하게 만든다. 타인을 신뢰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내 신뢰에 답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금세 실망하게 된다. 그런데 넬슨 제독은 부하들과 상하관계임에도 동지를 대하는 듯한 태도와 신뢰를 보냈다. 나 또한 그처럼 타인을 신뢰하는데 거리낌 없는 배포가 큰 사람이 되고 싶다.나일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던 73일의 추적은 넬슨 제독의 노력과 끈질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평생을 노력과 끈기로 살아온 인물인데, 해군 제독인 그가 항상 뱃멀미에 시달리면서도 큰 업적을 이루어 낸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또 그는 항상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기록하고 암기하여 어떤 상황이든 대처가 가능하도록 했다. 쉽게 들릴 수 있으나 일상 속 사건과 해결방법을 기록하고 이를 암기하기를 평생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끈기와 집념으로 이를 시행했으며 나아가 이로 인해 부하들에게 능력 있는 상관의 모습을 심어줄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성정은 그가 자만하며 자신의 직감을 믿기보다 치밀한 준비와 노력을 통해 목적을 이루어 내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특성이론 반박 시, 리더십 이론에 활용나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끈기를 보이는 일이다. 시작한 일을 끝내기 전, 어느 순간부터 괜한 걱정과 불안이 늘어, 결국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런 불필요한 생각이 목표 달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의구심을 없애고 목표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항상 어렵다. 누군가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도 그로 가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을 거라 위로하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처음에는 넬슨 제독의 끈기와 노력을 보며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사람인 이상 그 또한 불안과 내면의 갈등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는 이겨냈고 나는 아직 이겨내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타고난 사람”이라는 말 뒤에 숨어서 나를 방어하기 보다 넬슨 제독의 그 끈기를 본받아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도중 방향성을 잃는 일이 없어지면 좋겠다.마지막으로 현재까지도 영국인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그의 애국심과 대의명분이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 사망 직전에 의무를 다하고 죽게 되어 신께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으며 죽어가면서도 전시상황을 보고받는 등 자신의 의무를 중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국을 수호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다에서 싸우며 한 쪽 눈과 팔을 잃었다.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시신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며 트라팔가 광장에는 그가 사망한 위치의 높이에 넬슨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렇듯 영국인들에게 애국심과 의무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넬슨 제독이다.딱딱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각자의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인들은 이 의무를 하늘이 부여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자신의 의무는 스스로 만들고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결론사용넬슨처럼 범인류적 가치에 기인하진 않으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크고 작은 대의를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 나의 소소한 명분의 위한 걸음에도 많은 유혹이 존재하는데 그의 일생은 나보다도 훨씬 큰 풍파를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끝까지 자신의 의무와 국가를 위해 살았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나 또한 작은 의무라도 내가 가진 것을 잊지 않고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지며 살아가고 싶다.▣ 참고문헌이희명, 『이희명의 대단한 세계사』, 한국교육방송공사, 2013, 21~27강
    인문/어학| 2023.09.26| 5페이지| 2,500원| 조회(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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