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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학번 경희대 경영학과 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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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분야 시험자료경영/경제의/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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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중앙대학교 한국사 기말고사 정리본6(삼일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앙대학교 한국사 기말고사 정리본6(삼일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삼일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우리 대한민국은삼일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삼일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대한민국2. 1910년, 삼일운동 직전상황에서 국내에서는 많은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했다.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여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3.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운동은 점차 지방도시로 확산되었다.4. 비폭력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등 식민 통치 기관, 친일 지주 등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삼일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외 동포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었다.5.그러나 일제는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탄압했다.6. 황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을 교회에 집합,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하살했다.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0여만명이었다.7. 간단한 헌병통치하려고 하으나 삼일운동의 치열함, 조선인의 강인한 독립의지에 일본이 포기함.8. 1910년대에 나라 잃고 여러 국가에 독립기지 설치->삼일운동->나의 아집이 올히지 않았구나->1달 내에 독립기지 통합(상하이)->헌법에 삼일운동 명시됨.9.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헌법이 성립하게 된 사상적 배경은 1919년 삼일운동에서 비롯된다. 상하이를 거점으로 1919년 9월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되었다.10. 임시정부의 변천과정-상하이(1919-1932) : 가장 반도에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최초의 임시 정부: 국내외동포사회에 통합조직으로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 주력. 임시 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기의사의 의거로 활로를 찾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반격으로 상해를 떠났다.-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둥(1938), 류저우(1938): 윤봉길의사의 의거 직후 항저우로 옮긴 임시정부는 일제의 치열하고 지속적인 추격을 피해 중국 각처로 옮겨 다녀야 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던 중 발발한 중일전쟁(1937)은 8년간 지속되어다. 중일전쟁은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면서 끝을 맺었다.-치장(1939), 충칭(1940): 1939년 치장으로 옮긴 뒤부터는 전시체제로 정비함으로써 정상적 운영을 회복할 수 잇었다. 충칭에서는 상해시대처럼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광복군을 창설하여 태평양전쟁에 임하여 대일선전포고를 발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 인도, 버마 전선에 참전했던 점을 들 수 있다.임시 정부는 주로 중국정부를 통로로 국제외교도 강화하여 카이로선언(1943) 이후 우리나라 독입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았다. 건국강령을 1941년도에 발표하고 헌법을 1940-1944년에 개정하면서 광복 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나갔다.*카이로 선언: 1914년 제 1차 세계전쟁 이후(1914년, 우리나라는 1910년) 이후~~앞의 3대국은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자유 독립할 것을 결의한다.삼일운동은 어떻게 대한민국임시정부 건설로 이어졌고 이는 얼마나 가치 있길래 헌법에 기재되었는가?삼일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우리 대한민국은 삼일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삼일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대한민국2. 1910년, 삼일운동 직전상황에서 국내에서는 많은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했다.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여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3.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운동은 점차 지방도시로 확산되었다.4. 비폭력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등 식민 통치 기관, 친일 지주 등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삼일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외 동포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었다.
    학교| 2025.01.03| 2페이지| 2,500원| 조회(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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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중앙대학교 한국사 기말고사 정리본5(1894-1897년)
    중앙대학교 한국사 기말고사 정리본5(1894-1897년)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5ca43aaa.bmp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22pixel, 세로 205pixel연도사건명1894년(갑오년)동학농만운동(고부봉기 1.10-전봉준 체포 12.30)청일전쟁(1894 6-1894.3)1895년(을미년)삼국산섭을미사변(경복궁)1896년아관파천(1896.2.11.-1897.2.20.)*아관=러시아공사관*바로 가지 않았고 2.20까지 경운궁 준비기간을 거쳤다.1897년대한제국(10.12 : 황제즉위식)(경운궁=덕수궁)*고종의 길은 도망가는 길이 아니다. 위치 상, 아관->경운궁으로 가는 길이다.*1895년에서 1896년으로 가는 사이에 양력으로의 전환시기동학논민운동 : 나라를 도와서 백성을 안정시킴.2. 시대를 보는 다른 시선이 필요한 단서들2-1. 양력으로의 전환시기(1895->1896): 조선 정부는 태양력을 채택하고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삼았다. 즉 고정 32년 11월 16일까지는 음력으로 표기하고 다음날을 고종 33년 1월 1일로 삼아 양력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2-2. 삼국간섭(1895)이 보여주는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약육강식, 힘의 논리):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해 중국으로부터 요동 반도를 빼앗았다. 이에 일찍부터 남하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러시아는 이 지역에 오래전부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 끌어들여 요동 반도를 청에 돌려줄 것을 일본에 요구했다. 이를 삼국 간섭이라고 한다. 삼국간섭에 일본이 굴복하여 요동 반도를 포기했다. (프랑스+독일+러시아일본)3. 동학농민운동의 소박함-(무장 동학 무리의 포고문) 나랏일을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할(보국안민)-우려한 농민군은 관군에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정부가 받아들인다면 동학 농민군을 해산하겠다는 강화안을 정부 측에 제시했다.-(폐정개혁안 내용) 토지는 평균적으로 분작하게 할 것4. 동학 농민 운동 주요 사건 시기별 정리-고부봉기(1894.1) : 고부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항거: 고부봉기에 앞서 1893년 12월에 억울한 사정을 민소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2차례에 걸쳐 호소를 하였다. 한편 전봉준은 동학접주인 동지 20명과 함께 각 마을 집강에게 보내는 사발통문을 작성해 봉기를 맹약했다.-무장봉기(1894.3): 전봉준, 독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에서 민간에 무장동학포고문을 포고했다.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했고 인근 10여 읍에서 호응했다. 10일 만애 1만여명이 동원했다.백성은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이 쇠약해지면 나라도 쇠약해진다. 나랏일을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할 보국안민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 집을 지어 오직 혼자만 온전할 방법만을 찾고 오로지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니 이것을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3) 황토현전투(1894.4) : 1894년 4월 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격파한 전투: 1894년 3월 20일에 전봉준이 전라북도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표하며 본격화된 농민 항쟁은 4000여명의 농민군을 바탕으로 고부 관아를 점령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 후 태인으로 이동해서 4월 1일에는 태인 관아를 점령했다. 이미 각 고을의 아전들까지 농민군에 가담할 정도로 농민군의 세력이 커졌다.전라감영군 소집->4.3 농민군을 막기 위해 금구 방향 이동->농민이 이동방향을 전주성에서 태인 방면으로 바꿈->농민군은 4.3 부안으로 이동->4.4 부안 관아 점령, 무기 이용해 전열 갖춤.->4.6 부안 떠나 고부로, 태인 병력도 고부로 이동->도교산 접선->도교산 서쪽=태인과 고부 잇는 요지=황토현전라감영군은 농민군 주력부대 쫓아 고부쪽으로 이동->농민 패배한 척 황토현에서 후퇴->감영군은 밤에 황토현 도착->4.7 새벽 4시에 농민군은 무방비상태의 관군 기습에서 큰 승리 거둠->감영군은 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지휘부 다수 죽거나 도망침.->황토현전투에서 얻은 대승을 기반으로 농민군은 이후 전주성에 입성(4) 전주성 점령(4월)-청과 일본군 상륙-전주화약(5월)-일본군 경복궁 점령(6월)-1894.4.27.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입성.->5.5와 5.7에 청군대가 조선 정부 요청에 입성, 5.6에는 톄진 조약을 근거로 일본의 제물포 군대 상륙-> 청일 양국 군대가 진주하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것을 우려한 농민군은 관군에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정부가 받아들이면 동학 농민군을 해산하겠다는 강화안을 정부 측에 제시->관군을 이글던 초토사 홍계훈이 강화안 수락->1894.5.7.에 전주 화약 체결->동학농민군은 귀가하고 전라도관찰사는 농민들애개 폐정 개혁을 약속함.->6.21에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순변사와 초토사가 상경하면서 전라도 지역의 군사, 행정은 공백 상태->전라도관찰사가 전봉준과 전주에서 7월 6일 대타협하여 전라도 지역에서의 행정권 상당 부분 위임->치안기구이자 폐정 개혁을 주도하는 행정 자치 기구인 집강소 설치-> 동학교도가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 담당. 의결기관으로 읍마다 의사원을 둠 무력으로 호위군을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 잡강소 설치하고 폐정개혁안 추진->집강소가 행정 자치 기구로 확림됨에 따라 동학농민군은 지역적 차원이지만 사회, 경제적 생활 질서를 변화시킴.=>동학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자 조선 사회의 역사적 전진이라고 할 수 있다.*폐정개혁안 내용-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릴 것.-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것.-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징세 제도의 개혁, 탐관오리 처벌, 중소 상인층 보호, 사회적·정치적 개혁 등에 관한 요구(5) 청일전쟁 발발(1894-1895), 우금치 전투황토현 전투 비교-전주 화약 이후 농민군은 해산했고 정부는 일본군 철수 요구.->거부하고 일본군의 궁궐 침범, 청·일 전쟁 일으킴.->청일전쟁 승기를 잡은 일본이 조선 내정에 간섭, 화약 맺음.->동학농민군은 일본을 내쫓기 위해 다시 일어남.(10만명)->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 진격->관군이 일본군이 주둔하던 우금치로 후퇴->동학농민군은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많은 사상자 내고 참패->12월 전봉준 체포=>고부 봉기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 농민 운동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은 뒤에 항일 의병전쟁에 참전해 항일 투쟁의 전통을 이어 갔다.5. 삼국간섭과 을미사변: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중국으로부터 요동 반도를 빼앗았다. 일본이 러시아 남하를 막고 중국 대륙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러시아는 이 지역에 오래 전부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 들여 요동 반도를 청에 돌려줄 것을 일본에 요구했고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삼국간섭에 일본이 굴복함으로써 러시아 세력의 우위가 드러나자 일본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일본 공사는 일본군과 일본인 불량배들을 동원해 궁궐에 침입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을미사변(1895)라고 한다.*을미사변의 장소 : 경복궁 건청군(향원지 북쪽의 신무문 앞에 조성한 궁궐 내 별궁)->1896년에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경복궁을 떠났다.6. 아관파천과 경운궁 조성, 대한 제국 선포: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러시아로 처소를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1896)고종은 파천한 후에도 국정을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간비용을 전액 지원해 독립신문을 간행토록 했고 독립문을 조성했다. 서재필은 갑신 정변 실패후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1895년에 귀국하고 고종은 서재필에게 관직을 제수했다.파천 직후부터 경운궁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약 1년만에 경운궁을 왔다.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 열망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국제 여론에 힘입어 대한제국을 수립했다.(1897)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공한 이후 8월에 광무로 연호를 고치고 10월에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갖고 대한제국을 출범했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13년간 지속되었다.
    학교| 2025.01.03| 4페이지| 2,000원| 조회(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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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중앙대학교 한국사 기말고사 정리본4(조선 후기)
    중앙대학교 한국사 기말고사 정리본4(조선 후기)
    조선 후기 붕당 정치사림이 살아남은 이유-사림은 재지적 기반을 계승하고 가학의 전통을 바탕으로 삼았다.(있을재, 땅지)(가학=집안)-사림은 성리학적 정통성과 정치적 명분의 필요에서 학통(스승-제자)을 형성했다.->그들은 재지적 생활기반에서 상호관게를 맺으면서 학문세계나 현실 정치 개혁에서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사림파는 도학정치(백성을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를,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통해 군주나 백성이 천명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상사회의 실현을 최종적 목표로 규정했다.-사림파는 위민과 애민에 따라 정칙의 목표를 두고 그 실천을 위해 노력했다.-언로의 개방과 간쟁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서원건맂을 통해 향론을 점차 주도하게 됨에 따라 사림파의 향촌질서 재편운동은 결실을 맺었다.-향악의 보급을 통해 그들의 결속을 다지고 아울러 신분보다는 연령적 질서를 존중함으로써 소농민의 지지를 받았다.*서원은 훈구파의 탄압을 받은 사림파가 을사사화 이후 건립했다. 이는 사림파의 향촌활동에서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선조 이후 서우너은 사림간의 상호결속을 위한 장소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가지게 되었다. 붕당정치 이후 지방 사족의 여론이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고 지방 사족 역시 중앙 정치세력과 연계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했다. 이때 서원이 중심적 기능을 수행했다.사림이 중앙정계에 16세기 진출함에 따라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이론적 연구로 발전했다. (명분과 실천 중요)2. 선비의 뜻-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신진사대부-성리학의 개혁적인 성향)3. 사림의 농업정책: 소농민경영의 안정을 위해 권농정책을 펼쳤다. 사림파는 소농민의 농업경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농서의 편찬과 보급에 힘썼다.수리관개시설 : 천방과 제언사림파훈척세력(공신세력과 외척세력)가용처를 더 많이 개발넓은 지역 관개 가능둑을 설치천방=보=둑낮은 습지 개발(대규모 공사)산꼴짜기나 언덕 사이에 제방을 쌓아 빗물 및 게곡물을 모아 두는 수리시설제언=저수지14대 선조붕당 형성 :이조 전랑직 문제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파.세자 책봉 문제로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15대 광해군북인 정권16대 인조반정 : 서인의 권력기반 강화, 서인과 남인 공존17대 효종18대 현종예송논쟁 :서인과 남인의 대립1차 : 효종의 죽음으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 문제(1년=서인, 3년=남인)->1년(서인)2차 : 효종 비 인선왕후의 죽음으로(9개월=서인, 1년=남인)=>1년(남인)19대 숙종환국(손바닥 뒤집듯이 착착 바뀜)즉위 초 남인 정권 장악.경신환국 : 서인으로 교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20대 경종소론(경종 보호), 노론(영조지지)21대 영조즉위 초 노론 강세탕평책 시행22대 정조탕평책 계승, 노론의 분파(벽파와 시파의 갈등)4. 붕당정치 발전: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동인은 신진세력으로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했다. 서인은 기성 세력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중심이었다.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이후 숙종 때 서인이 노론과 서론으로 갈렸다.정치적인 면에서 상호 견제, 경쟁, 타협을 통해 특정 세력의 독주를 막아 정치를 활성화했다. 그리고 끊임없는 연구와 논쟁을 통해 학문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가학과 학통으로 형성된 붕당은 그 기반을 절대로 바꾸지 않았다.5. 붕당정치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300동안 지속된 붕당정치가 가진 무게는 상당하다.-당쟁이 만들어진 배경-조선시대에 대한 왜곡된 용어=>‘그들 조상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고 과장해 조선의 후손들에게 가르쳐라’=>왜곡용어 : 당쟁, 단군 신화, 이조학파에 따른 예학의 차이는 17세기 예송 논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종법에 대한 견해와 경서비판이다. 견서는 해석에 따라 왕례를 강조하는 면과 사례를 강조하는 면이 공존한다.왕사동례(서인) : 종법을 왕이든 사서인이든 모두에게 똑같이 작용해야 한다.왕사부동례(남인) : 왕에게는 종법을 사서인과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예송에서의 사상적 차이는 결국 사회에 대한 관점의 차이(세상을 바라보는 학문적 차이)로 연결되었다.6. 조선을 보는 마음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내 고민의 가치를 타인에게 측정하게 하지 않는다. 내 고민의 가치를 알고 당당해라!조선 후기 붕당 정치사림이 살아남은 이유-사림은 재지적 기반을 계승하고 가학의 전통을 바탕으로 삼았다.(있을재, 땅지)(가학=집안)-사림은 성리학적 정통성과 정치적 명분의 필요에서 학통(스승-제자)을 형성했다.->그들은 재지적 생활기반에서 상호관게를 맺으면서 학문세계나 현실 정치 개혁에서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사림파는 도학정치(백성을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를,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통해 군주나 백성이 천명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상사회의 실현을 최종적 목표로 규정했다.
    학교| 2025.01.03| 3페이지| 2,500원| 조회(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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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중앙대학교 한국사 기말고사 정리본3(조선시대 전기)
    중앙대학교 한국사 기말고사 정리본3(조선시대 전기)
    3. 조선전기 : 국가기틀마련(15C)과 사림등용(16C)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3de856b5.bmp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704pixel, 세로 395pixel고려는 10-11세기에 왕권을 강화했고 권력체계는 왕-귀족-호족이다. 반면에 조선은 15세기에 국가기틀을 마련했고 왕-관료 권력체계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다.2. 조선의 건국과 국가기틀 마련(통치체제를 정비하다): 조선 건국은 고려후기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상사회를 이루려는 사대부세력과 민의 성장 속에서 성립되었다, 조선 왕조의 통치제제 정비와 국정운영은 민본적인 유교사상을 기본 이념으로 했다. 고려시대에도 유교사상이 정치철학을 주도했지만, 불교철학에 의하여 크게 제약을 받았다. 유교사상이 정치, 제도,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온 이후이다.2-1. 조선초기의 유교사상에서 중시된 것은 왕도정치사상이다. 왕도정치란, 왕이 도를 갖춘다는 뜻이다. 유교로 교양된 국왕과 관료들이 유교적 정치체제 하에서 유교적 민본사상에 근거한 덕치와 인정을 베풀고, 또 유교윤리가 양반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 모두에게 생활화된 정치를 말한 조선 초기 건국의 주도세력은 이러한 유교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국가의 통치구조뿐만 아니라 경제구조, 산업부문을 국각가 주도해 권세가에 의한 개인 소유나 개인경영을 억제하려고 했다.3. 용어로 시대읽기 1 : 충(忠)-중심에 서 있는 마음, 마음에 중심이 있다.-군군신신부부자자 : 임금을 섬기고 임금을 교양시킨다. 마음의 중심에는 백성이 있다.-천명 : 왕으로서의 권위를 이미 상실한 자는 필부(한낱 사람)에 불과하다. 조선시대의 반정(중종반정(연산군 때), 인조반정(광해군 때))은 신하가 도리어 임금(천명)을 바꿔 바르게 일으키는 것이다.4. 용어로 시대읽기 2 : 경연(經筵)-TEXT를 의미하는 경(책)과 자리를 의미하는 연.-경연은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토론)하는 일이다. 임금에게 경사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다.-왕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태조는 경연청을 설치하고 정종과 태종도 각각 경연을 실시했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동안매일 경연에 참석했고 집현전을 정비해 경연관을 강화했다. 성종은 25년동안 매일 3번씩 경연에 참석했다,-새조와 연산군에 경연은 폐지되기도 했다. 곧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존속했다.-강의 방식 등은 세종과 성종 때 대체로 확립되었다. 성종은 하루에 세 번 참석했다.5. 왕권과 신권의 강약변화 : 6조 직계제와 의정부 서사제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3de80001.bmp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500pixel, 세로 329pixel조선 건국 초기 통치체계는 왕권과 재상권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더하는가에 따라 육조직계제와 의정부서사제가 각각 선택되었다.6. 6조직계제 : 6개의 행정부처에 곧바로 왕에게 아뢰는 것을 말한다. 왕이 6조에 직접 명령을 내려 실행하도록 하고 6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를 말한다. 국정운영에 왕의 결정권이 강해지고 재상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게 된다.7. 의정부서사제 : 의정부가 결재하여 6조에 일을 시키는 것이다. 조선 건국과 동시에 지나친 왕권의 비대함을 견제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이다. 육조에서 각기 맡은 업무를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는 3정승이 모여 육조에서 올라온 보고 내용의 가부를 헤아려 왕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리고 왕이 의정부에서 올린 내용을 보고 결정하여 교지를 내리면 의정부에서 받아 육조로 돌려보내 시행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국왕에게 집중되는 국정을 경륜이 풍부한 의정부 3정승이 함께 처리한다는 의미가 있다.실질적으로는 의정부의 권한이 강해지고 상대적으로 왕구너이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8. 15세기를 대표하는 다섯명의 국왕 : 태조-태종-세종-세조-성종9. 태종 : 재상중심 국정운영-개국 초에는 정치적, 사회적 안정이 급선무였고 태조로서도 왕권 강화가 우선이어서 정치기구와 통치체제를 정비할 여유가 없었다. 도평의사사는 문무고관의 합자기관이었으나 능률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태조 때의 정치는 강력한 왕권을 가진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조준,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아직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지 못했다.10. 태종 : 의정부설치, 6조 직계제-태종은 2차례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태종은 도평의사사(40명 중견신하가 국정운영)를 혁파했고 의정부를 설치했으며 사병을 혁파해 왕권강화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왕권 강화를 도모화려는 태종은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축소하고 배제할 수 이쓴 정치체제로 6조직계제를 택했다.11. 세종 : 권위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유교정치, 집현전, 의정부서사제-조선시대의 유교정치는 세종 때에 이르러 발전되었다. 세종은 지방제도와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권위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유교정치를 하고자 했다. 집현전은 세종 2년에 설치되어 많은 학자를 양성했고 의례와 제도의 정리와 다양한 편찬사업을 벌여 유교정치의 바탕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배출된 유학자들과 더불어 유교 정치를 펼쳤다. 이러한 집현전은 세종의 왕권강화에도 기여했다. 6조직계제를 세종 18년에 의정부서사제로 이행했다. 정치체제상으로도 유교정치를 펴기에 적합했다.12. 세조 : 6조직계제, 경연중지, 집현전 폐지-문종, 단종을 거치면서 의정부 재상들의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증대되었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세조는 독재적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6조직계제로 고쳤고 경연을 중지하며 집현전도 혁파했다. 이는 관료중심 체제와 자유분방한 정치비판, 언론활동을 이상으로 추구하는 언관과 집현전 학자들의 유교적 이상주의가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조 때의 정치는 이와 같이 유교정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강력한 집권정책을 실시했다.13. 성종 : 경연부활, 의정부서사제 논의, 사림등용,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 반포-세조 이후 예종을 거쳐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경연을 부활시키고 의정부서사제를 다시 시행하기 위한 논의 펼쳤다. 한편 사림세력을 대거 등용하여 비대하진 훈구세력을 견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등장한 사림과 훈구세력의 대립은 양반관료체제 내의 여러 문제와 결부되어 연산군 때 이후에 4차례의 사화로 나타났다. 성종은 세조 때부터 만들어진 경국대전을 수정하고 반포하면서 조선 초기의 정치제도를 일단 정비했다. 경국대전의 반포는 조선 초기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확립을 의미한다.14. 두 번째마디 16C, 사림등용과 4번의 사화, 특히 조광조의 기묘사화15. 고려에서 신진사대부로, 극소수는 조정의 중앙정부로 진출하는 훈구파가 되고 대부분은 향촌의 지방에서 사림이 되었다. 성종이 사림의 대거 등용하면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 갈등이 점화되었고 4차례의 사화가 일어났으며 이후 사림파의 붕당시대가 열렸다.16. 훈구파는 조선 건국, 왕자의 난, 세조의 정변 등에 협조하여 공을 세운 세력이다.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정비에 기여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했다. (공을 세운 오래된 세력)17. 사림파는 정치권력을 잡지 못하고 지방에서 학문에 종사하던 양반 세력이다.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 경제배경, 성리학에 투철하다. 영남과 기호지방 주심이다. 향촌 자치,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한다. 훈구세력을 견제한다. (수풀에 있는 선비)18.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 4차례나 커다란 사화가 일어났다. 훈구세력은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다. 사림파의 형성은 성리학 보급과도 상호 관계를 갖는다. 신진사대부에 의해 수용된 성리학은 성균관과 향교 교육을 통해 널리 보급 되었다. 성종 16년 이후에 훈구 세력에 대응되는 정치세력인 사림파로서 모습읗 갖추어 나갔다.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은 훈구세력과의 갈등과 충돌을 예고했다.19. 사화의 발생으로 사림파가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축출당한 사림파는 다시 힘을 키워 중앙으로 진출했다. 향촌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던 사림 세력은 정치 세력을 꾸준히 넓힌 반면, 훈구 세력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점차 사림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학교| 2025.01.03| 4페이지| 2,500원| 조회(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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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중앙대학교 한국사 기말고사 정리본2(고려시대 후기)
    중앙대학교 한국사 기말고사 정리본2(고려시대 후기)
    2. 고려시대(후기) : 고려 무신정권, 그리고 공민왕의 개혁정책(12C,13C,14C)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5bb44875.bmp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83pixel, 세로 472pixel고려 광종과 공민왕이 시행한 왕권강화정책의 공통점/차이점- 공통점 : 새 인물 등용과 국가수입기반 확대 및 위협세력 약화(위협세력; 광종:호족, 공민왕:권문세족, 친원파)- 차이점 : 광종의 노비안건법은 노비조사를 통한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공민왕의 전민변정도감은 노비와 토지조사를 통해 권문세족의 세력을 약화시켰다.*권문세족 : 힘 있는 사람 옆에 붙어서 더 강하게 하는 사람, 오래된 세력이어서 토지 보유多2, 무신란이 발생한 배경배경 1 : 전쟁과 중국 정세 변화=> 예종 때는 여진의 정벌이 있었고 금나라가 새로 일어나 고려에 군사적 압박을 가해왔다.배경 2 : 국내 정치적 혼란과 귀족사회 분열=>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무신란은 귀족사회 분열과 무신의 지위 상승이 맞물리면서 초래되었다.3. 공민왕의 개혁정책의 한국사적 의미왕권강화를 위한 정책 :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정방혁파, 전민변정도감 설치조선건국을 이끈 배경 : 성총관부 수복, 과거제 정비, 신진사대부 등용4. 공민왕이 성공하고 충선왕이 실패한 이유: 충선왕은 권세가들의 농장 몰수(전민변정도감), 사림원 설치(정방 혁파), 민생 안정(친원파 배제) 등을 도모했지만 권문세족의 반발, 원의 반대, 개혁 세력이 성장하지 못하여 실패했다. *사림원 : 왕명의 출납과 문서를 작성하고 인사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5. 공민왕이라는 성공의 칼날 : 쟤는 됐는데 왜 너는 못해! 노력이 부족한거야! 지혜로운 농부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잘되면 하늘 덕분이고 안 되면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집중하자.6. 문신란 : 과거제도와 유교주의가 채택되면서 문치정치가 되었다. 무신들의 지위가 하향으로만 기울어지지 않았다. 예종 때는 여진의 정벌이 있었고 금나라가 새로 일어나 고려에 압박을 가해왔다. 인종 때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있었다. 거듭 일어나는 군사행동은 무신의 지위를 상승시켰다.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거치면서 고려 귀족사회는 분열되었고 귀족사회가 갖는 폐쇄성으로 인해 그 자체 내의 대립과 분쟁을 가져왔다. 무신란은 귀족사회의 분열과 무신의 지위 상승이 맞물리면서 초래되었다.의종이 궁밖으로 행차할 때, 정중부와 이의방이 반란을 일으켰다.7. 무신정권 : 이의방->살해->정중부->살해->경대승(착함)->벙사->이의민(엄마 천민, 글자 못 읽음)->살해->최충헌->최우->최항->최의->김준->임연->암유무정변의 동지들을 제거한 정중부는 장군 경대승에게 살해되었고 경대승은 4면 만에 병사했다. 이어 이의민이 정권을 독점했으나 최충헌에게 살해된다.최충헌은 자신이 구축한 강력한 독재정권을 자손들에게 세습시킴으로써 4대 60년간의 최씨정권을 형성했다. 최우가 집권한 10년만에 몽골의 침입이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화전을 둘러 대립 갈등과 전쟁으로 입은 사회경제적인 피폐는 최씨정권을 크게 약화시켰다. 특히 어린 나이에 집권한 최의는 어리석고 나약했다. 김준은 최의를 제거하고 무신집권자가 지니는 교정별감에 임명되나 임연에게 살해된다. 임연은 병사하고 아들 임연무가 교정별감이 되지만 제거 당했다.8. 전국적 농민·천민 봉기: 무신정권기를 거치면서 사회적으로는 신분질서의 동요와 하극상의 풍조로 하층민의 반란이 일어났다.(만적의 난) “이래로 높은 관직도 천한 노비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경험과 그 축적(신분질서의 동요, 신분해방을 위한 시도)9. 봉건적이고 왕-귀족-호족 권력관계인 고려가 근세이고 왕-관료 권력관계인 조선이 된 것은 무신란으로 인한 신분동요와 신분 해방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9. 공민왕의 개혁정치: 공민왕은 14세기 후반, 원명교체라는 대륙정세를 이용해 많은 개혁을 추진했다. 공민왕은 대외적으로 배원정책을 펴 몽고의 잔재를 일소하고 빼앗긴 영토의 회복을 위해 북진정책을 실시했다. 대내적으로는 고려왕실을 약화시킨 친원권문세족을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재정립하기 위해 일곱 차례에 걸친 관제개혁을 실시했다.(1)공민왕은 신흥사대부들을 대거 기용해 반원개혁정치를 실시하고자 학교제도와(2)과거제를 개혁했다.(3)내정에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4)100년이나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여 원나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했다.(5)정방을 폐지하고(6)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주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켰다.10. 정방 : 최우가 문무백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자기 집에 설치한 기구이다. 이는 공식 인사기구로 설치된 것이고 무신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국가기관으로 변해 존속되었다가 공민왕 때 폐지되었다.11. 정동행성 : 고려후기 원에 의해 일본 우너정을 위한 전방사령부로서 고려에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이문소는 본래 개경에서의 대원관계의 범죄행위를 다스리는 업무를 맡았다. 그러다가 친원세력의 불법과 전횡을 옹호해주고 반원세력을 억누르는 기관으로 변질했다. 공민왕의 반원개혁의 첫 조치의 하나로 정동행성 이문소가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12. 쌍성총관부 : 고려 후기 몽고가 고려의 화주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관부이다. 대대적인 반원운동을 전개하면서 이 지역을 수복한 것이다. 이 때 이 지역에 토착해 있던 이자춘이 고려군에 내응함으로써 쌍성총관부는 폐지하는 데 큰 도움을 끼쳤다. 이후 이자춘은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이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시켰고 이것이 그의 아들인 이성계가 뒷날 조선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세력의 기반이 되었다.*쌍성총관부 폐지 : 기구 폐지, 이 지역을 수복 :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지역회복)13. 신진사대부의 등용과 성장 : 신진사대부는 주로 하급관료나 지방향리의 자제들로 가문적 배경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력을 갖추어 과거 등을 통해 이미 무신정권기부터 대두하고 있었다. 공민왕대의 혁신정치와 더불어 크게 성장하여 정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결국에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주체가 되는 세력이다.유교적 소양을 알아 예의 범절을 지키고 청렴을 표방하면서 그렇지 못하여 여러 가지 불법과 부정을 저지르는 세족과 권문을 비판하며 대립되는 위치에 섰다. 이들의 성장은 고려후기 계속되는 개혁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충선왕의개혁정치에 이어서 충숙왕, 충목왕, 공민왕 등이 연달아 개혁을 추진했다. 공민왕대의 반우너개혁저이를 거치면서 정계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성계와 손을 잡은 이들은 마침내 위화도회군으로 정계를 주도하는 세력이 되거니와, 이후 그들은 당시의 현안문제였던 토지제도나 공양왕의 옹립 및 왕조 교체 등을 둘러싸고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혁파로 분화되었다.
    학교| 2025.01.03| 3페이지| 2,500원| 조회(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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